조희대 대법원장은 지금 대한민국 헌법을 자기 사무실 안에서 다시 쓰고 있다. 그가 한 말은 간단하다. “다시는 대법관 제청을 하지 않는다. 헌법에 재제청 근거가 없다.” 그 한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더 간단하다. 내가 제청하면 국회도, 대통령도 거절하지 마라. 거절하면 자리는 비워 두고, 국민의 재판은 밀리게 하라. 공석은 나의 무기가 된다. 이것이 2026년 가을, 대법원이 청와대에 내민 통첩이다.
먼저 묻자.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누가 임명했는가.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조희대를 지명하고 임명한 이는 윤석열이다. 윤석열이 앉힌 자가, 윤석열 이후 선출된 대통령의 대법관 임명권 앞에서 ‘재제청은 헌법에 없다’고 버틴다. 자기가 앉은 자리는 대통령 임명권의 산물인데, 남이 앉힐 대법관 자리에서는 그 임명권을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삼권분립을 입에 올리는 순간, 분립은 견제가 아니라 한쪽의 성역으로 둔갑한다. 헌법 제104조 제2항은 짧다.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여기에는 세 개의 권한이 나란히 놓여 있다. 제청, 동의, 임명.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를 삼키라고 쓰여 있지 않다. 국회가 동의를 거부하면 그 후보는 떨어진다. 대통령이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보내지 않거나 임명을 하지 않으면 그 후보는 대법관이 되지 못한다. 1957년 이승만 이후 69년 만의 재제청 요구가 ‘초유의 폭거’라면, 협의 없는 일방 서면 제청 역시 헌정 관례를 깬 초유의 통보다. 한쪽만 초유이고 다른 쪽은 신성불가침이라는 말은, 법률가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궤변이다.
조희대의 논리의 핵심은 이것이다. 헌법 문면에 ‘재제청’이라는 단어가 없으니, 대통령이 반려해도 나는 다른 사람을 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묻겠다. 헌법 문면에 ‘임명 거부 금지’라는 단어도 없다. 헌법 문면에 ‘대법원장이 제청한 자를 대통령이 무조건 임명한다’는 문장도 없다. 없는 것을 근거로 삼는 순간, 없는 것은 양쪽에 다 있다. 그런데 왜 없는 것은 대통령에게만 불리하고, 있는 것처럼 읽히는 것은 대법원장에게만 유리한가. ‘내가 제청하면 끝’이라는 독법은, 제청권을 임명권 위의 왕권으로 올리는 해석이다. 청와대가 말한 대로, 그것은 선출된 권력의 임명권을 무력화하는 독해다. 대법원장이 제청권을 지키려는 것과, 공석을 인질로 잡아 대통령을 굴복시키려는 것은 같은 행위가 아니다.
노태악 전 대법관 퇴임 이후 공석은 이미 반년을 넘겼다. 대법관 1인당 연간 수천 건이 쌓이는 구조에서 한 자리의 공백은 통계가 아니라 당사자의 시간이다. 밀린 선고, 밀린 파기환송, 밀린 확정. 그 시간의 값은 대법원장 집무실이 아니라 하급심을 기다리는 국민이 치른다. ‘사법부 독립’을 외치며 공석을 방치하는 독립은, 국민으로부터의 독립이다. 독립이 면책으로 바뀌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더 큰 문제는 대법관 한 자리가 아니다. 헌법 제104조 제3항을 다시 읽어야 한다.
「대법관이 아닌 법관은 대법관회의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대법관 14명을 누가 제청하는가. 대법원장이다. 그 대법관들이 모인 대법관회의의 동의로, 나머지 법관 전체를 누가 임명하는가. 다시 대법원장이다. 동의의 문턱은 과반이다. 과반을 만드는 대법관을 제청하는 손이 같고, 그 손으로 고등법원장·지방법원장·고등부장의 자리를 채운다면, 그것은 견제 장치가 있는 인사가 아니라 자기 복제의 사다리다. 병아리 판사에게까지 매일 지시를 내릴 필요는 없다. 재판장을 쥐고, 법원장을 쥐고, 전보와 보직의 숨구멍을 쥐면 된다. 관료제는 명령이 아니라 인사로 완성된다. 예전에 등기소 창구에서 오가던 급행료의 풍경이 사라진 뒤에도, 법원이 행정기관보다 더 관료적이라는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점의 인사가 거의 닫힌 회로이기 때문이다.
2026년 2월, 국회는 대법관 정원을 14명에서 26명으로 늘리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2028년부터 해마다 4명씩, 2030년에 26명. 증원과 퇴임 후임을 합치면 현 대통령 임기 안에 임명될 자리가 수십에 가깝다. 바로 그 문턱에서 조희대가 ‘제청은 내 고유 권한, 재제청은 없다’고 못을 박는다. 숫자가 커질수록 제청권의 무게도 커진다. 공석을 오래 끌수록, 자기 구상대로의 후보를 밀어붙일 시간은 길어진다. 국민 앞에서는 적체를 한탄하고, 청와대 앞에서는 적체를 방패로 쓰는 이중장부다.
견제가 없는 권력은 반드시 살림에서도 티가 난다. 감사원은 대법관과 법원행정처장에게 법령 근거 없는 월정 격려금을 현금으로 정기 지급한 사실을 적발했다. 조희대 취임 이후 업무추진비는 억 단위로 쌓였다. 고급 식당, 부풀린 인원, 증빙의 공백 — 국정감사와 야당 폭로가 가리킨 방향은 한결같다. 재판의 독립을 말하면서 예산의 독립까지 면죄부로 가져가려는 태도. 삼권분립이 감사와 징계와 정보공개까지 비켜 가게 만드는 방패가 되는 순간, 분립은 특권이 된다. 와인을 앞에 놓고 혈세를 논하는 조롱이 나오는 이유도 그것이다. 숫자가 한두 건의 영수증 문제가 아니라, 누가 이 조직을 감시하는가라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조희대 쪽 반론은 이미 나와 있다. 제청권은 사법부 독립의 마지막 보루다. 대통령이 마음에 드는 사람만 앉히면 대법원은 행정부의 분점이 된다. 과거 정권에서도 대통령실이 제청 전에 특정 후보를 배제하려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반론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독립은 공석의 권리가 아니고, 제청은 임명의 대체물이 아니다. 독립이 맞다면 추천위원회가 올린 복수 후보 안에서 협의하고, 국회 동의의 장으로 나가면 된다. 손봉기 후보를 국회에 올려 부결시키든, 다른 추천 후보를 다시 제청하든, 길은 막혀 있지 않다. 그가 고른 길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내 제청안을 통째로 받거나, 아니면 자리를 비워 두라. 이를 독립이라 부르는 순간, 독립은 대화 거부의 다른 이름이 된다.
탄핵은 감정으로 하는 사형이 아니다. 헌법 제65조가 열어 둔, 선출되지 않은 헌법기관에 대한 유일한 민주적 제동이다. 국회 재적 3분의 2. 그 문턱은 높다. 높아야 한다. 그러나 높은 문턱이 곧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을 뜻하지는 않는다. 직무와 관련된 중대한 법 위반, 헌법이 배분한 권한의 고의적 유린,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담보로 한 장기 공석 — 이 세 가지가 겹치면, 탄핵은 과장이 아니라 제도의 본래 용도다. 특별재판부를 당장 꾸리지 못해도, 법률로 전담 재판부를 둘 수 있다는 주장은 별론이다. 지금 국민이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재판부의 이름이 아니라, 재판부를 구성하는 꼭대기가 헌법을 자기 해석으로 봉쇄해도 되는가이다.
조희대를 이 자리에 둔 채 대법관 증원만 논의하는 것은 문을 잠근 사람에게 방의 크기를 더 넓혀 주는 일이다. 윤석열이 임명한 대법원장이 이재명 정부의 임명권을 봉쇄하는 구도를, ‘정치 중립’이라는 말로 덮을 수는 없다. 중립이 한쪽 정권의 유산을 다음 정권의 헌법 권한보다 위에 두는 순간, 그것은 이미 중립이 아니다. 죄값을 물을 날은 구호로 오지 않는다. 국회가 소추하고, 헌재가 심리하고, 국민이 그 과정을 지켜볼 때 온다. 그 전까지 공석은 계속되고, 하급 법관의 인사는 닫힌 회로를 돌고, ‘헌법에 그런 조항은 없다’는 문장이 하나의 통치 기술이 된다.
당장 그 회로를 끊어야 한다. 조희대를 탄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