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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과 정청래의 ‘언론-정치 복합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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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8. 04
한국 정치의 흐름에서 ‘언론과 정치의 경계’는 자주 희미했다. 군부 독재와 친일 정권에 익숙한 정치 체제에서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미증유의 쿠데타 발생까지 경험했으니, 이제는 더럽고 비루한 정치 감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최근 김어준과 정청래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종의 ‘언론-정치 복합체’는 그 희미한 경계마저 의도적으로 지우고, 양자의 유착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결합은 인연이나 우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진영 정치의 정서적 동원과 여론 생산이 어떻게 하나의 구조로 통합되어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한국 정치사상 유례없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수백 년 전 당쟁으로 나라가 망조로 흘렀다는 그때와 유사한 유전자 조합들이 펼쳐내는 진귀한 데자뷰 정치를 보는 듯 하다.
 
김어준은 원래 언론인이 아니다. 그는 기자 출신도, 방송사 소속의 전문인도 아닌, 기획자형 언론인이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래할 줄 아는데 단지 무대가 정치판이었다. 당연히 그의 언론 활동은 정치적이었다. ‘나는 꼼수다’를 시작으로, ‘뉴스공장’ ‘다스뵈이다’에 이르기까지, 그는 권력을 감시하거나 사실을 전달하려는 언론의 기본 역할에서 한 단계를 넘어선 특정 진영의 정서와 분노를 조직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사실(fact)보다 내러티브(narrative)를 우선했고, 그 내러티브는 언제나 선명한 정치적 목적을 가졌다. 그의 언론은 의심의 기술이 아니라 확신의 기술이었고 그 선명성을 숨기지 않는 뻔뻔함도 타고났다.
 
그러나 김어준의 활동을 단순히 선동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가 제기한 여러 의혹 중 상당수는 권력의 부패나 비리와 연결되어 있었고, 기존 언론이 일부러 놓치거나 소홀히 한 사안들을 파헤치는 한 발 앞으로 나간 역할을 자처했다. 특히 ‘나는 꼼수다’는 기성 언론의 성형 남녀 앵커들이 앵무새 같은 대본만 읽는 경직성과 권력 유착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대변하며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문제는 그의 방법론이 언론의 기본 원칙이 점차 내규에 따른 추측과 의혹 제기에 의존해가며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는 점이다.
 
반면 정청래는 전형적인 구시대 정치인이다. 당리당략도 사리사욕도 아닌, 급발진과 충동성으로 즉흥성을 발휘하는 감성 호소형, 그러나 그의 정치 활동은 언론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넘나든다. 그는 방송과 유튜브에 빈번히 등장하며, 자신의 메시지를 전통적인 정치 언어가 아닌 ‘선동 가능한 언어’로 포장해 전달한다. 김어준이 대중의 정서를 형성하면, 정청래는 그 정서를 국회라는 제도 정치의 언어로 변환한다. 김어준과 정청래의 관계는 서로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다. 정청래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그는 전통적인 정치인의 역할을 넘어서 일종의 ‘미디어 정치인’으로 기능한다. 그는 복잡한 정치적 사안을 단순화하고 극대화하여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 능숙하며, 이는 정치에 무관심했던 시민들을 정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방식은 정치적 사안의 복잡성을 제거하고, 흑백논리에 기반한 진영 대립을 심화시키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그의 전달 방식은 정당 대표에게 임팩트와 이미지를 요구하는 단세포적이고 즉흥성에 반응하는 아이돌 정치를 원하는 대중을 결집하는 데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
 
이들이 함께 구축한 일종의 의견 생산 → 정서 동원 → 정치 실현의 회로는 민주주의의 자유로운 여론 시장이라기보다는, 폐쇄적 진영 동원 시스템에 가깝다. 워낙에 독재와 친일잔재에 익숙해진 한국인은 이 두 악어 커플이 주는 현란한 개인기에 매우 즐거워하며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다. 김어준이 특정 사안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고 이슈를 만들어내면, 정청래가 이를 국정감사나 국회 발언을 통해 공식화한다. 이 과정에서 주변인 역할을 하는 민주당 의원들이 번갈아 김어준을 띄워준다. 사안의 사실 여부보다 정치적 효과가 우선시되며, 반대편의 반박이나 해명은 체계적으로 무시되거나 왜곡 축소된다. 이 패턴은 일제강점기 어용 언론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한국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언론 선동과 세뇌에 관한 논문이 없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정치에 매우 익숙해진 국민성 때문이기도 하다. 김어준이 항일운동이나 민족주의를 언급한 적이 있나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정청래와 김어준의 주고받기 만담에서 언론은 독립된 제3의 감시자가 아니라, 정치의 선도자 임무를 수행한다. 김어준의 발언은 종종 정청래의 입법이나 정치적 주장과 기묘하게 수렴하며, 이는 자발적 협업을 넘어선 일종의 정치 선전기구 구실을 한다. 시민은 이 시스템 안에서 수용자가 아니라 시청자로 기능하고, 반대 진영은 철저히 무대 관람에서 배제된다. 여론이 다양성과 객관적 검증이 아니라 충성도로 측정되고, 언론은 검증이 아니라 선동으로 존재 이유를 증명하게 된다.
 
이런 언론-정치 복합체가 탄생한 데는 분명한 시대적 배경이 있다.
 
첫째, 기존 언론에 대한 깊은 불신이다. 남북 분단과 대립을 고착화할 아무런 필연성도 없는 한국 사회에서, 민족 동질성의 회복이나 전 인류의 공동체 의식을 고양하려는 교육은 체계적으로 결여되어 왔다. 이로 인해 대중은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분열과 냉전의 유산 속에 갇혀 살아왔다. 조선·중앙·동아일보로 대표되는 기성 언론이 권력과 자본에 종속되어 바로 이 역사 해석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을 은폐하거나 왜곡함으로써 분단체제를 정당화하는 담론을 끊임없이 재생산해 왔다. 이러한 왜곡 구조 속에서 그는 ‘갑분 김어준’이라는 새 장르로 모든 인식의 테를 뛰어 넘어버렸다. 무고하되, 무지한 대중은 그런 김어준의 혁명성에 반응하면서 대안 언론에 대한 갈망에 대한 답이 된 것이다.
 
둘째, 거대 양당 정치의 고착화로 인한 정치적 좌절감이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고 느끼며, 더 직접적이고 감정적인 소통 방식을 선호하게 됐다. 국민의 권리는 대리 만족의 카드 선택이 아니라, 직접적인 권리 행사에서의 적확한 판단력을 갖출 때 정치적 좌절감을 해소할 수 있지, 시원한 사이다를 권하는 인포테이너를 대신 세워서는 안 된다. 인생에서 ‘대신’이나 ‘때문’이라는 것은 없다. 누구를 대신 사는 인생은 과정과 끝이 불행하고, 누구 때문에 할 걸 하지 못했노라고 핑계를 대는 자는 결국엔 실패한 인생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인생의 법칙이다. 김어준은 독특한 개성으로 사업에 성공한 사람이지만, 그에게 과도한 정치적 기대를 거는 것은 이제 위험하다. 정치적 판단과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각자의 몫이다. 민주주의가 어려운 것은, 각자의 선택이 전체의 운명을 바꾼다는 점이다. 각자 심사숙고해서 내란으로 독재 시대로 돌아갈 뻔한 21세기 한국 정치는 미래 한국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셋째,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이다. 유튜브, 팟캐스트 등 새로운 플랫폼은 기존 언론의 게이트키핑(gatekeeping theory: 뉴스 보도의 취사 선택) 기능을 우회할 수 있게 했고, 누구나 쉽게 자신만의 미디어를 운영하고 선택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다양성의 증가라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사실 확인 없는 정보의 유통과 에코 챔버(echo chamber: 매체에 따른 확증 편향) 현상도 심화시켰다. 감옥 안 빤스 시위를 벌인 윤석열이 극우 유튜버 애청자라는 사실로 볼 때, ‘누구 대신 누구 때문에 ...카더라’를 각인한 뇌의 불행을 교훈 삼을 필요가 있다.
 
넷째, 정치적 양극화의 심화다. 특히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의 각종 사건(세월호 참사, 국정농단 등)은 사회적 갈등을 극도로 심화시켰고, 이런 상황에서 중도적이고 균형 잡힌 목소리보다는 극단적이고 선명한 메시지가 더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패륜적이고 반인륜적인 묘사가 정치인들 레벨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이 자극에 불붙은 극단의 갈등이 한국 사회를 완전히 병들게 했다는 사실이다. 선진국의 양극화는 보통 경제 불평등에서 비롯되는데 한국인은 특이하게 물질적 가난은 참는 데 익숙한 체질이지만, 정치적 신념과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는 살인도 불사할 만큼의 선동에 취약해진 모습을 보인다. 이 정치적 양극화는 거의 히틀러를 선택했던 독일 국민의 정서 수준이다. 정청래나 김어준을 히틀러로 만드는 것은 국민에 달린 선택이다.
 
김어준-정청래 현상이 정치의 엔터테인먼트화를 낳았고 이들보다 더 원색적이고 코믹한 조합의 프로가 증가했다. 복잡한 정책 이슈보다 감정적 자극이 우선시되는 경향 속에 중간중간 상품을 팔면서 먹고 마시는 정치 쇼가 언제 어떤 식으로 변질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김어준-정청래식 언론-정치 복합체가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은 복합적이다. 긍정적 측면에서는 시민 참여의 확대, 권력 견제 기능의 강화, 다원주의의 확산 등을 들 수 있지만, 부정적 측면으로는 공론장의 분할, 사실 기반 토론의 약화, 정치적 양극화의 심화 등이 우려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의 심화다. 사람들이 자신의 기존 믿음을 확인해주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소비하고 이것이 사회적 분열을 더욱 심화한다. 또한, 복잡한 정책 이슈가 단순한 선악 구도로 환원되면서, 합리적 정책 토론의 공간이 줄어들고 있다.
 
지금, 언론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언론은 정보 전달, 권력 감시, 공론장 형성이라는 세 가지 기능을 수행 해왔지만, 김어준식 언론은 이 중에서 권력 감시 기능만을 극대화하고, 나머지 두 기능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다는 특징이 있다. 문제는 권력 감시조차도 선택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문제점은 축소하거나 은폐하고, 반대편의 문제점만을 집중적으로 부각한다. 이는 언론의 공정성과 객관성이라는 기본 원칙과 배치된다. 언론만의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 역시 변화해야 한다.
 
첫째, 정치인들이 복잡한 정책 이슈를 단순화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시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둘째,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네거티브 전략보다는, 건설적인 정책 경쟁에 집중해야 한다. 셋째, 소셜미디어 등을 통한 직접 소통에서도 책임감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원고 없이 마이크를 잡을 수 없는 사람은 본질에서 정치인의 자격이 없다. 최소한의 세비로 활동하되 언제든 마이크를 잡고 정치 시스템의 변화에 관심이 많은 자원 봉사자급 정치인의 탄생이 필요하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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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선생
8
쿠데타 정국 극복에 큰 역할을 했지만, 선한 영향력만 있지는 않을테니 이렇게 짚어 주시는 것은 좋습니다. 다만,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의 심화"라는 지적은, 김어준-정청래식 언론-정치 복합체가 만들어 내는 문제가 아닌, 너튜브 알고리즘으로 대표되는 개인화된 콘텐츠 추천 시스템의 본질적 한계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깉습니다. "기술 중립성을 가정한 알고리즘이 실제로는 편향을 증폭시키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와 같이, 일개 민간 언론이 아닌 디지털 미디어 생태계 전반의 문제에 대해 분석할 때 나올 접근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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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74
10
김어준과 정청래가 불러온 '언론-정치 복합체'라는 개념에 공감합니다. 다만, 이것이 오직 부정적이라 보긴 어렵습니다. 기존 권력에 대한 대중의 감시 기능이 전통 언론이 망각한 시대에, 그들이 일으킨 반향은 분명 변화의 촉매였습니다. 문제는 그 영향력이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해치는 방식으로 제도화되고 있다는 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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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上
8
정말 핵심을 꿰뚫은 글입니다. 언론이 감시자가 아니라 정치의 '입'이 되면 그 순간부터 언론이 아니라 선동기관입니다. 김어준이든 정청래든, 대중의 분노를 연료 삼아 권력을 휘두르려 한다면, 그 끝은 히틀러식 선동 정치와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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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7
정치판은 결국 스토리 싸움입니다. 누가 더 선명하게, 더 감정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느냐가 이기는 구조죠. 이게 바로 김어준-정청래 조합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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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York
3
하지만 그런 정치는 결국 시민을 무력화시키고, 정치 불신을 더 키울 뿐입니다. 이제는 냉철한 시민이 필요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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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arian
7
사실보다 내러티브가 앞선다는 지적은 너무 중요합니다. 언론이 의혹을 던지기만 하고, 그 결과로 정치가 요동친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김어준식 언론의 위험성은 단지 선동이 아니라, 검증되지 않은 감정을 정책 결정에 연결시킨다는 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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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on
8
극과 극의 목소리가 커지는 시대에 이 글처럼 구조를 꿰뚫는 시선은 드뭅니다. 김어준과 정청래가 상징하는 정치-언론 결합 현상은 확실히 문제지만, 대중의 무기력감과 기존 언론에 대한 불신도 함께 고려해야 문제의식을 현실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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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i
6
어차피 언론도, 정치도, 이익의 네트워크일 뿐이죠. 김어준과 정청래는 그저 기존 질서에 색다른 포장을 입혔을 뿐이고, 대중은 또 다른 쇼에 박수치는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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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6
문제는 김어준-정청래가 아니라, 그들을 소비하게 만든 한국 정치와 언론의 구조입니다. 기득권화된 언론과 무책임한 정치인들 사이에서 대중은 새로운 통로를 찾은 것뿐이죠. 이 글은 그런 구조적 원인을 정확히 짚으면서도 해법까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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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상어
6
‘정의’나 ‘진실’ 같은 말은 요즘엔 너무 값싸져서 의미가 없어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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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raman
4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김어준-정청래식 진영정치는 이제는 경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비판을 못 견디는 진영은 결국 쇠퇴하게 되어 있고, ‘우리 편’이기 때문에 무조건 감싸는 문화는 민주주의를 해칩니다. 이 글은 그런 자성의 출발점이 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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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a_Kim
4
기성 언론과 정치가 국민을 얼마나 배신했으면, 김어준 같은 인물이 대중의 대안으로 떠올랐겠습니까. 물론 문제도 많지만, 그들을 단지 선동꾼으로 몰아가기 전에, 그들이 왜 이토록 호응받는지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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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orphin
2
이 모든 현상은 결국 비판적 시민 교육의 부재로 귀결됩니다. 언론 소비의 기준도, 정치 판단의 기준도 없이 살아온 결과가 지금 이 사태죠. 김어준-정청래 현상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수준을 결코 초과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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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3
과잉의 일반화 와 감정적 글, 보수와 진보를 함께 다루는 대칭구조는 어디에?.시민들의 판단력이나 참여능력을 경시 하는 지극히 개인적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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