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年7月6日、東北アジア歴史財団が公開した米国極東空軍司令部(FEAF)の1948年6月24日付「独島爆撃事件報告書」がある。発見の経緯はよく分からないが、1948年6月8日、在日米空軍の爆撃演習中に独島で操業していた韓国漁民14人が死亡し、多数が負傷した独島爆撃事件の悲劇を調査しながら作成された機密文書のようだ。この文書作成主体であるFEAFは「Far East Air Force」の略で、単数形の場合は1941年に創設されたフィリピン駐留米陸軍航空隊組織を指し、複数形である「Far East Air Forces」と書かれる場合は1944年に作られた西南太平洋一帯空軍統括部隊を指すが、6.25当時、韓半島を焦土化した戦闘機指揮本部は、この複数形FEAFから出た極東軍司令部であり、その位置は日本の東京にあった。単数複数は重要ではない。フィリピンの米軍と日本の米軍がなぜ一つにまとめられ、6.25戦争基地として使用されたのだろうか。
ギリシャ神殿を模した帝国主義様式の明治生命館(Meiji Building)、1951年米軍撮影
現在の明治生命館 / 建築家 岡田信一郎(1883~1932)の初期スケッチ
核心は、東北アジア財団が報告書で、「1947年9月にリアンクール岩(独島、Liancourt Rocks)が『韓国の一部(a part of Korea)』であることが『明確に確立(definitely established)』された」と明記していると述べ、報告書の焦点を「領土問題」に置いたことだ。東北アジア財団は盧武鉉政権時代に中国の東北工程、日本の歴史教科書歪曲などに対抗するために作られた政府出資機関だが、ここに植民史観の問題点を提起する研究者がいるという話は聞いたことがない。李在明政権初期に「桓檀古記」に言及した際に戸惑った人物であるパク・ジヒャン(1953~)が首長だが、それなりに政府の性格に合わせて「独島は韓国の領土」という雰囲気を盛り上げようとしたようだ。パク・ジヒャンは尹錫悦在任中に任命され、<解放前後史の再認識>を執筆した共同著者の一人であり、ニューライトを志向している。
1948年6月8日の独島爆撃事件を報告書として作成した6月24日から2ヶ月近く経った8月、李承晩は外信記者会見を開き、日本に「対馬返還」を要求した。米国は発表日を8月17日と記録したが(KOREA’S RECENT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OIR Report No. 4900, March 30, 1950, DEPARTMENT Of STATE)、韓国の大統領記録館には8月19日となっているという。翌日の8月19日から国内メディアで報道が始まり、10日後には日本は返還の根拠がないと反論した。しかし、対馬返還問題は中国、ソ連、香港、広東にまで国際的に議論が交わされ、1950年の元旦記者会見で李承晩は「まず自力で統一し、対馬返還は後で徐々に進めよう」と述べた。つまり、連合国がいる限り日本の再侵略はないだろうから、お互いに感情を害することなく、対馬帰属問題は事必帰正なので強化会議で決定されるだろうと、一歩引く姿勢を見せた。
植民地奴隷生活から抜け出した喜びも束の間、解放空間の騒乱の中でようやく見えてきた真実は、領土がおかしいという人々の考えが噴出していることだった。そこで李承晩は国内メディアに、米国が先に済州島返還要求の記者会見を行うよう指示した。1950年の米国務省情報調査局OIR(U.S. Department of State, Office of Intelligence Research, Division of Research for Far East)報告書#4900がこのインタビューの日付を1948年8月17日と記録しているのは、米国が2日早く、李承晩の外国メディア記者会見を指示したことを意味する。米国は「In the heart of every Korean is a longing for the return of those islands(すべての韓国人の心には、それらの島の返還への切望がある)」という米国の分析に基づいて、李承晩に済州島は元々我々の土地であると世論のレベルに合わせさせた。しかし、報告書の内容通り、済州島は歴史的に日本が実効支配を行ってから350年(1950年OIR #4900時点)以上経っているのに、韓国人はなぜこのように反応したのだろうか。これについてはさらなる調査が必要である。次回では、独島問題や済州島問題など、島嶼地域の領土問題を解決する米国の解決策について説明する。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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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ter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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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폭격 사건을 단순히 "미국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한 증거" 정도로만 해석하는 건 너무 단편적이라는 지적은 생각해볼 만합니다. 당시 미군정과 냉전 초기의 전략까지 함께 봐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네요. 2편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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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ky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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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주장 가운데는 상당히 과감한 해석도 있지만, 최소한 1948년 전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영토 문제를 다시 검토해 보자는 문제 제기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사료는 사실이고, 해석은 계속 검증되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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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j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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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문제를 일본과의 양자 갈등으로만 봤는데, 미국의 점령정책과 냉전 전략까지 연결해서 설명하니 새로운 시각이네요.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역사 해석도 다시 살펴볼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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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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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단순한 독도 이야기가 아니라 해방 공간과 미군정, 제주4·3, 여순사건, 한국전쟁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네요. 동의 여부를 떠나 자료와 논리를 계속 제시해 준다면 흥미로운 연재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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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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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제는 정치적 진영을 떠나 최대한 많은 사료를 검토하고 토론해야 합니다. 이 글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에 잘 다루지 않았던 자료와 시각을 소개했다는 점에서는 읽어볼 가치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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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o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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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독도 폭격으로 희생된 어민들의 비극은 잊혀져 왔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남습니다. 영토도 중요하지만 희생자들의 역사 역시 제대로 조명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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革命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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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당시 어떤 전략적 계산을 했는지는 충분히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역사적 사실과 추론은 구분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후속 편에서 더 많은 1차 사료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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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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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이 사료를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라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같은 문서라도 어떤 관점으로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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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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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일본, 소련의 이해관계를 함께 봐야 한다는 주장에는 공감합니다. 독도 역시 냉전이라는 큰 틀 속에서 접근해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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