キリスト教が覆い尽くした「初期ハワイ移民」を見る宗教的観点は、当時の世界史的流れの中で事案の重大性と事実関係を糊塗する部分が少なくない。「新民会」は1903年にホノルルで洪承河らによって設立されたハワイ初の在外同胞団体だが、設立者が林蚩正(1880~1932)なのか、洪承河(1863~1918)なのかを巡って異論がある上、二人とも後に帰国した。亡国の純粋な民が異国万里の労働者として売られていく境遇のために、国内で信仰訓練を受け宣教師の資格を得た洪承河や、漢学を学んだプロテスタント信者である林蚩正が、現地先発隊として「信仰とより良い環境」を宣伝するために派遣されたのかもしれない。今日、ハワイ移民の中でこの時に根を下ろし成功したコリアンの子孫を見つけるのが難しい理由も、西洋信仰の存在が極度の劣悪な環境で提供した信仰であり、福祉の恩恵が望ましい環境を提供した信仰の結果とは見なせないからである。例外的に、米国本土シカゴでマフィアと賭博場の運営で集めた資金で安昌浩一家の事業と独立運動を支援したジェイソン・リー(Jason Lee 李民錫(漢字表記不明)、1896?~1971)が第一次世界大戦の参戦者であるという事実を考慮すると、「朝鮮人-大韓帝国人-韓国人」の逆境を記録だけで探すのは無意味である。彼が活躍した戦場と彼の故郷は果たしてどこだったのだろうか。
1905年、サンフランシスコの親睦会である「共立協会」の機関紙「共立新報」は、国内の啓蒙運動家たちが教育や実業の振興といった実力養成論ばかりを主張し、義兵戦争に参加しないと批判的な論説を頻繁に掲載し、国内のニュースを迅速に伝えた。日露戦争で勝利した日本が満州に勢力を拡大すると、中国で経済的利益を追求していた米国との対立が深まり、米国西部(現在の米国西部以外の地域も含む)では日本人移民排斥と日本人学生の学校分離問題が外交摩擦に発展した。日本を圧迫する様相は、韓人たちに米日衝突が日本の韓国支配を揺るがす機会にな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期待を抱かせた。その戦争は、一世代が過ぎた1941年の真珠湾攻撃(Attack on Pearl Harbor)として現れる。この対立の溝がどこで発生したのかを解き明かす問題は、今後の課題である。
1904年8月22日 第一次日韓協約 (The Japan–Korea Protocol of August 1904)
1905年7月29日 桂・タフト協定 (Taft–Katsura agreement)
1905年11月17日 乙巳勒約 (第二次日韓協約, The Japan–Korea Treaty of 1905)
1907年2月15日 日米紳士協約 (The Gentlemen’s Agreement of 1907)
1907年7月24日 第三次日韓協約 (丁未七条約, The Japan–Korea Treaty of 1907)
1908年11月30日 ルート・タカヒラ協定 (Root-Takahira Agreement)
1910年8月22日 日韓併合条約 (The Japan–Korea Treaty of 1910)
1910年8月22日、大韓帝国の統治権(sovereign)、すなわち国家統治権の喪失に至るまで、まず日本と国際社会は第一次日韓外国人顧問招聘協定書を締結した(1904年8月22日 第一次日韓協約)。ちなみに日本は、同じ外国人雇用条約を1958年7月29日に「日米修好通商条約(ハリス条約、Treaty of Amity and Commerce (United States–Japan) or Harris Treaty)」として締結した。日本の開国=近代化=文明開化を誇る明治維新以前に、外国人が自由に日本を改造することに印を押し、その学習効果を大韓帝国にそのまま適用する。
1854年3月31日、ペリーと江戸幕府の間で日米和親条約(Japan-US Treaty of Peace and Amity or Kanagawa Treaty)が締結された。
초기 한인 이민을 단순히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난 자발적 이주’로만 설명해서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식민지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하와이와 미주 한인사회가 어떻게 독립운동의 조직적 기반으로 변해갔는지, 이민·종교·교육·국제정세를 함께 놓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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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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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의 역사를 미국에서 성공한 이민자의 이야기로만 쓰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초기 이민자들에게 미국은 꿈의 땅이기 전에 생존을 위해 선택한 낯선 땅이었습니다. 농장과 사탕수수밭에서 힘겹게 일하면서도 동포들이 돈을 모아 고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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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a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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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하와이 이민을 종교사나 노동이민의 관점에만 가두지 않고 러일전쟁, 가쓰라-태프트, 미일관계, 을사늑약과 연결해서 보자는 시도가 흥미롭습니다. 다만 당시 이민을 ‘국제적 음모’로 단정하기보다는 실제 모집 과정과 계약서, 선박 기록, 금융·인력회사 자료를 하나씩 대조한다면 훨씬 강력한 역사적 논증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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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無十日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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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후손의 입장에서 보면 할아버지 세대가 왜 그렇게 교회와 한인회, 학교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이제 조금 이해할 것 같습니다. 낯선 나라에서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살아남으려면 공동체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가 단순한 친목을 넘어 고국의 독립을 위해 움직였다는 점에서 초기 미주 한인의 역사는 특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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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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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아버지 세대가 미국으로 건너온 이야기를 들으면 ‘기회를 찾아 떠났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고향에서는 나라가 흔들리고 있었고, 타국에서는 말도 문화도 낯선 노동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만들고 동포끼리 서로 돕고 독립운동까지 이어갔다는 사실이 오늘의 미주 한인사회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를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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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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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미국 이민을 성공의 역사로 이야기하지만, 처음 이 땅을 밟은 한인들에게는 낯선 언어와 인종차별, 고된 노동이 먼저였습니다. 그럼에도 서로 의지하며 한인 공동체를 만들고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독립운동까지 이어갔습니다. 미주 한인의 역사는 단순한 이민사가 아니라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타국에서 정체성과 공동체를 지켜낸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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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el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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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고향을 떠났다는 사실보다, 떠난 뒤 스스로 공동체를 만들고 독립운동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 같은 조직이 교육·생계·자치와 독립운동을 동시에 수행했다는 점을 보면 초기 이민사는 대한민국의 해외 기원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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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ngg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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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 가장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은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국가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백성들이 생존을 위해 국경 밖으로 밀려났고, 그곳에서 다시 공동체와 지도체계를 만들어야 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디아스포라 개념으로도 다시 볼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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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바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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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농장에서 일했는지, 누가 교회를 세웠는지, 누가 독립운동 자금을 냈는지 같은 이야기가 집안마다 전해집니다. 그래서 초기 한인 이민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정부 문서뿐 아니라 이민자들의 편지와 사진, 교회 기록과 후손들의 구술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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